스핀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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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물리 통계 물리 마지막 수정: 2026-07-27 04:36:18

1. 개요[편집]

스핀글라스(spin glass)는 스핀 사이의 결합 상수 JijJ_{ij} 의 부호가 무작위로 고정되어 있어, 어떤 스핀 배열도 모든 결합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는 무질서·좌절(frustration) 계이자, 그 결과 자유에너지 지형이 지수적으로 많은 골짜기로 쪼개지는 물질 상태를 가리킨다. 실험적으로는 금에 철을 조금 섞은 AuFe 같은 희석 합금에서 처음 발견됐다 — 자화율이 어떤 온도에서 뾰족한 첨점(cusp)을 보이는데, 정작 중성자 산란으로 들여다보면 강자성체 같은 규칙적 자기 질서가 전혀 없다. 스핀 방향이 유리(glass)처럼 무작위로 “얼어붙은” 것이다.

이징 모형이 “모든 결합이 사이좋게 +J+J” 인 착한 세계라면, 스핀글라스는 여기에 J-J 를 무작위로 섞어 넣은 것뿐이다. 이 사소해 보이는 변경 하나로 계는 상전이 이론의 표준 도구가 전부 안 먹히는 괴물이 되고, 바닥상태를 찾는 문제는 NP-난해가 되며, 물리학이 아니라 최적화·신경망·부호이론으로 튀어나간다. 조르조 파리시가 이 문제에서 발견한 구조로 20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1

2. 무질서와 좌절 — 왜 이게 어려운가[편집]

두 가지 개념을 먼저 구분해야 한다.

  • 퀜치드(quenched) 무질서: JijJ_{ij} 가 한번 뽑히면 시뮬레이션 내내 고정이다. 스핀만 열적으로 움직인다. 물리량은 각 시료(realization)에서 열평균을 낸 뒤 시료 앙상블에 대해 평균한다. 즉 A\overline{\langle A \rangle}, 그리고 자유에너지는 kBTlnZ-k_BT\,\overline{\ln Z} 다.
  • 어닐드(annealed) 무질서: JijJ_{ij} 도 스핀과 함께 요동한다면 kBTlnZ-k_BT \ln \overline{Z} 로 계산하면 되고, 이건 그냥 자유도가 늘어난 보통 계다. 문제는 실제 합금이 퀜치드라는 것.

lnZ\overline{\ln Z} 를 계산할 수 있는 표준 방법이 없다는 게 스핀글라스의 첫 번째 벽이다. 여기서 나온 꼼수가 복제 트릭(replica trick)이다.

lnZ=limn0Zn1n\overline{\ln Z} = \lim_{n \to 0} \frac{\overline{Z^n} - 1}{n}

정수 nn 개의 동일한 복제본을 만들어 Zn\overline{Z^n} 을 계산한 뒤 n0n \to 0 으로 해석적 연속을 하는, 수학자가 보면 기절할 조작이다. 놀랍게도 답이 맞는다.

두 번째 벽은 좌절이다. 정사각 격자의 한 플라케트(정사각형 하나) 둘레의 결합 곱

Φ=J12J23J34J41\Phi = J_{12}J_{23}J_{34}J_{41}

이 음수면 그 플라케트는 좌절되어 있다. 네 결합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스핀 배열이 존재하지 않고, 최소한 하나는 반드시 “손해”를 봐야 한다. ±J\pm J 를 반반씩 뽑으면 Φ<0\Phi<0 일 확률이 정확히 1/21/2 이므로, 격자의 절반이 좌절 상태다. 좌절된 플라케트끼리는 자기 마음대로 상쇄되지 않고 계 전체를 가로지르는 도메인 벽으로 이어져서, 바닥상태가 하나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아진다.

3. 에드워즈-앤더슨 모형과 오더 파라미터[편집]

가장 표준적인 모형은 1975년 에드워즈-앤더슨(EA) 모형이다.

H=i,jJijSiSj,Si=±1\mathcal{H} = -\sum_{\langle i,j \rangle} J_{ij}\, S_i S_j , \qquad S_i = \pm 1

최근접 이웃만 결합하되 JijJ_{ij}±J\pm J 이항 분포나 가우시안 분포에서 독립하게 뽑아 고정한다. 문제는 오더 파라미터다. 자화 m=Sim = \overline{\langle S_i \rangle} 는 스핀 방향이 무작위라 저온에서도 0이다. 즉 “얼어붙었는데 자화는 0”인 상태를 잡아낼 지표가 필요하다. 에드워즈와 앤더슨의 답은 제곱을 먼저 하는 것이었다.

qEA=SiT2q_{\mathrm{EA}} = \overline{\langle S_i \rangle_T^{\,2}}

각 스핀이 시간 평균해서 특정 방향으로 치우쳐 있으면(=얼어붙었으면) 부호와 무관하게 qEA>0q_{\mathrm{EA}}>0 이다. 고온 상에서는 SiT=0\langle S_i \rangle_T = 0 이라 qEA=0q_{\mathrm{EA}}=0. 수치적으로는 같은 JijJ_{ij} 를 공유하는 두 복제본 α,β\alpha,\beta 를 독립적으로 돌려 겹침(overlap)

q=1NiSiαSiβq = \frac{1}{N}\sum_i S_i^\alpha S_i^\beta

의 분포 P(q)P(q) 를 측정하는 게 국룰이다. P(q)P(q) 의 모양이 뒤에 나올 이야기의 전부다.

64×48 격자 ±J 에드워즈-앤더슨 모형을 메트로폴리스로 돌리되, 같은 결합 배치를 공유하고 초기 배열만 다른 복제 두 벌을 동시에 굴린다. 왼쪽 둘이 각 복제의 스핀이고 셋째가 국소 겹침 s1·s2 지도이며, 아래에는 q = (1/N)Σ s1 s2 의 히스토그램이 프레임마다 쌓인다. 기본값 p = 0.5, T = 0.6 에서는 좌절 플라케트가 절반(이론값과 함께 상단에 표시)이고 두 복제가 서로 다른 골짜기에 갇혀 q가 0 근처를 넓게 맴돈다. 온도를 2.5 로 올려 상자성 영역에서 재면 평균 |q| 가 0.02 근처로 좁아지므로 저온의 그 폭은 유한 크기 잡음이 아니고, 리셋할 때마다 P(q)의 폭과 모양이 달라지는 것 또한 관찰 대상이다 — 겹침 분포가 시료마다 다르다는 비자기평균성이 복제 대칭 깨짐 그림의 예측이기 때문이다. p를 0으로 내리면 순수 강자성체가 되어 q가 ±1 로 밀려간다(도메인 벽이 남으면 중간값에 한참 머무니 온도를 1.0~1.4 로 올리면 훨씬 빨리 합쳐진다). 결합 J는 리셋과 p 조작에서만 다시 뽑고 온도를 바꿔도 얼어붙은 채로 둔다(quenched). 2차원 ±J 계는 유한온도 전이가 없으므로 저온에서 보이는 것은 전이가 아니라 지수적으로 느려진 얼어붙음이고, P(q)는 단일 시료 단일 시계열의 누적이라 시료 앙상블 평균은 들어 있지 않다.

차원 의존성은 사악하다. 2차원 ±J\pm J EA 모형은 유한 온도 스핀글라스 전이가 없다TSG=0T_{SG}=0 이다. 3차원에서야 TSG0.95JT_{SG} \approx 0.95\,J 정도의 진짜 전이가 나타난다. 2D에서 밤새 시뮬레이션 돌리고 “전이 온도가 안 잡혀요”라고 하는 건 코드 버그가 아니라 물리다.

4. SK 모형과 복제 대칭 깨짐[편집]

셰링턴-커크패트릭(SK) 모형은 EA의 평균장 판본이다. 모든 스핀 쌍이 결합하되, 세기를 NN 으로 스케일한다.

H=i<jJijSiSj,JijN ⁣(0, J2N)\mathcal{H} = -\sum_{i<j} J_{ij}S_iS_j, \qquad J_{ij} \sim \mathcal{N}\!\left(0,\ \frac{J^2}{N}\right)

셰링턴과 커크패트릭은 1975년 복제 트릭에 복제 대칭(모든 복제본 쌍의 겹침이 같은 값 qq)을 가정해 풀었는데, T0T \to 0 에서 엔트로피가 1/(2π)-1/(2\pi) 라는 음수로 나왔다. 이산 스핀계에서 음의 엔트로피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가정이 틀렸다는 뜻.

파리시가 1979~80년에 내놓은 해법이 복제 대칭 깨짐(Replica Symmetry Breaking, RSB)이다. 복제본을 하나의 값 qq 로 묶는 대신, 블록 안에 블록이 들어가는 계층 구조로 쪼갠다(무한 단계 RSB). 그 물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저온 상은 하나의 상이 아니라 지수적으로 많은 순수 상(pure state)으로 쪼개져 있다. 각 상은 자유에너지 장벽으로 분리된 골짜기다.
  • 서로 다른 골짜기 사이의 겹침 qq 가 여러 값을 갖기 때문에 P(q)P(q) 가 델타 함수 두 개가 아니라 연속적인 지지를 갖는다. 이게 RSB의 실험적/수치적 지문이다.
  • 상태들 사이의 거리는 울트라메트릭(ultrametric)이다. 임의의 세 상태 α,β,γ\alpha,\beta,\gamma 에 대해 dαγmax(dαβ,dβγ)d_{\alpha\gamma} \le \max(d_{\alpha\beta}, d_{\beta\gamma}) 가 성립한다. 즉 상태들이 계통수(dendrogram) 형태로 조직돼 있고, 삼각형은 항상 이등변이다.2

이 구조는 오랫동안 “수학이 아니라 마술”로 취급받았지만, 게라의 부등식과 탈라그랑의 2006년 증명으로 SK 모형에 대해서는 엄밀하게 확립됐다. 다만 유한 차원 EA 모형이 RSB 그림을 따르는지, 아니면 피셔-휴즈의 드롭릿(droplet) 그림(저온 상이 본질적으로 두 개, 시간 반전 쌍뿐)을 따르는지는 40년째 논쟁 중이다. 유한 크기 효과가 워낙 커서 수치 실험만으로 결판이 안 난다.

5. 거친 지형, 에이징, 그리고 느려짐[편집]

RSB가 말하는 “지수적으로 많은 골짜기”는 시뮬레이션 하는 사람에게는 곧 재앙이다.

  • 임계적 느려짐을 넘어선 느려짐: 보통 상전이의 임계 감속은 τξz\tau \sim \xi^z 인 멱법칙이지만, 스핀글라스에서는 장벽 높이가 크기에 따라 자라서 완화 시간이 τexp(Δ/T)\tau \sim \exp(\Delta/T)지수적이다. 격자를 두 배 키우면 시간이 두 배가 아니라 지수배로 든다.
  • 에이징(aging): 급랭 후 경과 시간 twt_w 에 따라 응답 함수가 달라진다. 상관 함수가 C(t+tw,tw)C(t+t_w, t_w) 로 두 시간에 따로 의존하고 시간 병진 불변성이 깨진다. 요동-소산 정리도 위반된다. “언제 담금질했는지”를 계가 기억한다는 뜻이고, 실제 실험에서 기억(memory)·재활(rejuvenation) 효과로 관측된다.
  • 그래서 스핀글라스는 담금질 모사병렬 템퍼링의 고향이 됐다. 후쿠시마-네모토가 1996년 병렬 템퍼링을 정식화한 동기가 정확히 EA 모형의 저온 표본추출이었다. 골짜기에서 빠져나오려면 온도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수밖에 없다.

6. 계산 문제로서의 스핀글라스[편집]

바라오나가 1982년에 보인 결과가 결정적이다. 3차원 격자(또는 자기장이 있는 평면 격자) 스핀글라스의 바닥상태를 찾는 문제는 NP-난해다. 반대로 자기장 없는 2D 평면 격자는 최소 가중치 완전 매칭으로 다항 시간에 풀린다. 이 경계선 덕분에 스핀글라스는 물리 문제인 동시에 조합 최적화의 표준 벤치마크가 됐다.

  • 이징 해밀토니안은 QUBO(quadratic unconstrained binary optimization)와 선형 변환으로 동치라, 여행하는 외판원·그래프 분할·집합 커버 같은 문제를 전부 스핀글라스로 인코딩할 수 있다.
  • 그래서 이징 머신(양자 어닐러, 결맞음 이징 머신, 디지털 어닐러) 업계는 성능 주장을 대부분 EA/SK 인스턴스로 한다. 문제는 이 벤치마크가 “쉬운 인스턴스”를 뽑기 쉬워서, 공정한 비교 설계 자체가 연구 주제라는 것.3
  • 호프필드 신경망의 에너지 함수가 바로 EA 해밀토니안이고, 기억 용량 한계(αc0.138N\alpha_c \approx 0.138 N)는 SK 계열의 복제 계산으로 유도됐다. 압축 센싱·부호이론·최적화 문제의 상전이 분석도 같은 도구를 쓴다. 통계물리가 지역 최적해 이야기를 최적화 커뮤니티보다 먼저 정량화한 셈이다.4

7. 관련 문서[편집]

8. Footnotes[편집]

  1. 2021년 노벨 물리학상은 파리시가 절반, 마나베 슈쿠로와 클라우스 하셀만이 나머지 절반을 나눠 받았다. 수상 사유가 “원자 규모에서 행성 규모까지 물리계의 무질서와 요동의 상호작용”이라, 스핀글라스와 기후 모형이 한 문장에 들어가는 진귀한 광경이 연출됐다.

  2. 울트라메트릭 공간에서는 모든 삼각형이 이등변이다. 익숙한 예가 생물 분류나 파일 경로 — “고양이와 개의 거리”가 “고양이와 참치의 거리”보다 가깝고, 공통 조상까지의 깊이만으로 거리가 결정된다. 저온 스핀글라스의 상태들이 딱 이런 계통수로 조직돼 있다는 게 파리시의 주장이었고, 처음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안 믿었다.

  3. 무작위 ±J\pm J 인스턴스는 의외로 쉬운 편이라, 벤치마크용으로는 위샤트 플랜티드(Wishart planted) 앙상블처럼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는 인스턴스를 쓴다. “우리 하드웨어가 시뮬레이티드 어닐링보다 1억 배 빠릅니다” 류의 발표를 볼 때는 어떤 인스턴스인지부터 확인하는 게 예의다.

  4. 좌절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제 물리를 떠났다. 딥러닝 손실 지형의 안장점 구조를 논할 때 인용되는 논문들의 절반은 SK 모형 계열의 계산이다. 스핀 두 개 사이의 부호 하나가 이렇게 멀리 갈 줄 누가 알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