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재규격화군(renormalization group, RG)은 “보는 스케일을 바꿀 때 이론이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추적하는 방법론이다. 계의 미시 자유도를 일정 배율 만큼 뭉개고(coarse-graining), 길이를 다시 로 재척도해 원래와 같은 형태의 모형으로 되돌린 뒤, 그 과정에서 결합상수가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본다. 이 변환을 로 쓰면, 물리는 결합상수 공간 위의 흐름(flow)이 되고 임계현상은 그 흐름의 고정점 문제로 바뀐다.
이 문서는 방법론 쪽이다. 무엇이 임계점에서 일어나는가라는 현상 자체는 상전이·이징 모형·퍼콜레이션 문서가 다루고, 여기서는 그 문서들이 당연한 듯 쓰는 “임계지수는 보편적이다”, “유한크기 스케일링을 하면 된다” 같은 말이 왜 성립하는지를 설명한다. 케네스 윌슨이 이 공로로 198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통계물리·장론·난류·수치해석이 같은 언어를 쓰게 된 것이 이 방법론의 부산물이다.1
2. 블록 스핀 — 카다노프의 조대화[편집]
레오 카다노프가 1966년에 제시한 그림이 가장 직관적이다. 2차원 이징 모형의 스핀들을 짜리 블록으로 묶고, 각 블록을 다수결로 결정되는 블록 스핀 하나로 대체한다. 격자 간격이 배로 커졌으니 길이를 로 나누어 원래 격자로 되돌리면, 스핀 수는 로 줄었지만 형태는 똑같은 이징 모형이다. 다만 결합상수가 로 바뀌어 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상관거리의 거동이다. 물리적 상관거리는 변하지 않았는데 격자 단위로 재면 가 된다. 그래서 임계점이 아니라면 조대화를 반복할수록 는 계속 줄어들어 결국 0 또는 로 도망간다. 오직 인 임계점에서만 가 성립한다 — 즉 임계점은 RG 변환의 불변점이다. 임계상태가 “스케일을 바꿔도 똑같이 생겼다”는 자기 유사성, 즉 프랙탈적 성질을 갖는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이름에 “군(group)“이 들어가지만 사실은 반군(semigroup)이다. 조대화는 정보를 버리는 연산이라 역원이 없다. 뭉갠 스핀을 되살릴 방법은 없다.
3. 흐름 방정식, 고정점, 보편성[편집]
가장 깔끔한 실물 예는 1차원 이징 모형의 데시메이션(decimation)이다. 한 칸 걸러 하나씩 스핀을 합해 없애면 남은 스핀 사이의 유효 결합이 정확히
로 나온다. 고정점은 (무한 온도)과 (절대영도) 둘뿐이고, 인 모든 출발점은 반복하면 으로 흘러간다. 유한 온도 상전이가 없다는 1차원 이징의 유명한 결론이 흐름도 한 장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2차원 이상에서는 과 사이에 불안정 고정점이 하나 더 생기고, 그것이 곧 임계점이다.
여기서 보편성이 자동으로 따라온다. 미시적으로 전혀 다른 두 모형(격자 기체, 이축 자성체, 액체-기체 임계점)이라도 RG 흐름의 같은 고정점으로 빨려 들어가면 임계 근방의 거동이 같아진다. 임계지수는 미시 상호작용의 세부가 아니라 고정점의 성질이고, 고정점은 공간 차원과 질서변수의 대칭성 정도로만 결정된다. 미시 모형의 나머지 정보는 흐름 도중에 전부 씻겨 나간다.
4. 관련·무관련 연산자와 임계지수[편집]
고정점 근방에서 흐름을 선형화하면 이야기가 정량적으로 바뀐다. 를 넣고 야코비안을 대각화해 고윳값을 로 쓰면, 대응하는 스케일링 변수 는 조대화 한 번마다 배가 된다.
- — 관련(relevant). 반복할수록 커져 계를 고정점에서 밀어낸다. 임계점에 있으려면 실험자가 손으로 0에 맞춰야 하는 양이다. 이징에서는 환산온도 와 외부장 둘뿐.
- — 무관련(irrelevant). 반복할수록 죽는다. 차차근접이웃 결합이든 격자 구조든 전부 여기에 들어가고, 이것이 보편성의 메커니즘 그 자체다.
- — 주변(marginal). 선형 차수에서 결정이 안 되고 로그 보정을 만든다. 4차원 이징이 이 경우.
관련 변수가 두 개뿐이라는 사실에서 자유에너지의 스케일링 형태 가 나오고, 여기서 임계지수 전부가 두 숫자의 함수로 떨어진다. 예를 들어 , , 이다. 실험적으로 관측되던 러시브룩·위덤 같은 스케일링 관계식이 왜 등식인지가 이 한 줄로 설명된다. 지수 6개가 사실은 자유도 2개짜리였던 것.
5. 실공간 RG vs 운동량 공간 RG, 그리고 ε 전개[편집]
- 실공간 RG: 블록 스핀·데시메이션·미그달-카다노프 근사처럼 격자 위에서 직접 뭉갠다. 그림이 직관적이고 1차원·계층격자에서는 정확하지만, 2차원 이상에서는 조대화 한 번에 원래 없던 상호작용(삼체·사체·장거리)이 무한히 생겨나서 어딘가에서 잘라내는 절단 근사가 불가피하다. 지수 정확도가 잘 안 나오는 이유다.
- 운동량 공간 RG(윌슨): 푸리에 공간에서 껍질 안의 모드만 적분해 없앤 뒤 와 장을 재척도한다. 여기에 유효장 이론의 언어가 그대로 붙는다. 이론에서 이걸 돌리면 4차원 위에서는 가우스 고정점(평균장 지수)이 안정하고, 4차원 아래에서는 비자명한 윌슨-피셔 고정점이 나타난다.
를 작은 수로 보고 섭동 전개하는 것이 ε 전개다. 결과는
3차원은 이라 “작은 수”가 전혀 작지 않은데도, 1차항까지만 넣어 이 나온다(3차원 이징의 정밀값은 근처). 차원을 연속 변수로 취급해 전개한다는 발상이 물리적으로 얼마나 뻔뻔한지를 감안하면 놀랄 만큼 잘 맞는 편이다.2
6. 수치 시뮬레이션에서의 RG[편집]
RG는 칠판 위 이론에만 머물지 않는다. 몬테카를로 방법 기반 시뮬레이션 실무는 사실상 RG의 언어로 굴러간다.
- 임계 감속: 임계점 근처에서 자기상관 시간이 로 폭발한다. 국소 갱신 알고리즘의 동적 지수 자체가 RG가 정의하는 보편량이고, 클러스터 알고리즘이 를 크게 낮추는 것도 그 프레임 안에서 이해된다(세부는 상전이 참고).
- 유한크기 스케일링(FSS): 유한 격자 에서는 가 을 넘을 수 없으니, 스케일링 형태의 자리에 을 넣으면 관측량이 꼴로 정리된다. 여러 의 곡선을 를 축으로 겹쳐(collapse) 와 를 동시에 뽑는 표준 기법이 바로 이 식에서 나온다.
- 몬테카를로 재규격화군(MCRG): 시뮬레이션으로 뽑은 배위에 블록 스핀 변환을 직접 먹이고, 블록화 전후 관측량의 상관에서 선형화 행렬의 고윳값을 측정한다. 임계지수를 섭동 전개 없이 통계적으로 재는 방법.
- 격자 QCD: 격자 간격 인 연속체 극한을 취하는 절차 자체가 자외 고정점을 향한 RG 흐름이다. 점근 자유성 덕에 를 줄이면 벌거벗은 결합이 0으로 흘러가고, 베타 함수가 와 결합의 관계를 지정한다. 시만칙 개선 작용은 무관련 연산자를 골라 상쇄해 이산화 오차의 차수를 올리는 작업이고, “완전 작용(perfect action)“은 아예 RG 고정점 위의 작용을 쓰겠다는 발상이다.
7. 조대화라는 공통 언어 — LES와 ROM[편집]
전산유체 쪽 사람이 RG를 읽으면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데, 착각이 아니다.
대와류 모사는 나비에-스토크스에 폭 짜리 필터를 씌워 격자보다 큰 스케일만 남기고, 걸러진 작은 스케일이 큰 스케일에 미치는 영향을 부격자 응력 모델로 대신 넣는다. 구조가 정확히 조대화 + 유효 결합이다. 실제로 야호트와 오르작은 무작위 강제항이 있는 나비에-스토크스에 ε 전개식 RG를 적용해 - 모형의 계수들을 유도했고( 등), 그 결과물이 상용 코드에 RNG - 이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들어가 있다. 표준 k-엡실론 모델의 계수가 실험 맞춤인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다.3 동적 스마고린스키 모델이 두 개의 서로 다른 필터 폭에서 잰 양을 맞춰 계수를 결정하는 것도, 스케일 간 관계식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같은 골격이다.
축소차수모델도 마찬가지다. POD 모드를 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버린 뒤 갤러킨 사영하면, 버린 모드가 남긴 모드에 하던 에너지 전달이 사라져 시스템이 발산하거나 에너지를 과하게 축적한다. 그래서 폐쇄항(closure)을 넣는데, 이 구조를 정확하게 쓴 것이 모리-츠방치히 형식론의 기억항이다. “자유도를 줄이면 반드시 유효 항이 생긴다”는 명제는 스핀이든 와류든 POD 모드든 동일하게 성립한다. 재규격화군은 그 명제를 체계적으로 다루는 유일한 문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8. 관련 문서[편집]
9. Footnotes[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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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 본인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재규격화군은 계산 도구가 아니라 사고방식”이라는 취지의 것인데, 실제로 이 방법으로 손계산을 해보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된다. 정확한 흐름 방정식은 무한 차원 공간 위에 있고, 우리가 쓰는 건 전부 그 그림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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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을 3.9987로 두자”는 문장이 진지한 논문에 등장하는 분야가 흔치 않다. 참고로 ε 전개 급수는 수렴하지 않는 점근급수라, 항을 무작정 늘리면 오히려 나빠진다. 보렐 재합산 같은 재합산 기법이 표준으로 쓰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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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RNG - 이 “이론적으로 유도됐으니 더 정확하다”고 믿으면 곤란하다. 유도 과정의 가정(강제항의 스펙트럼, ε의 크기)이 실제 공학 유동과 얼마나 맞는지는 별개 문제이며, 벤치마크에서 표준 모형에 지는 케이스도 흔하다. 유도의 우아함과 예측 정확도는 다른 축이다. ↩